유월의 오늘*

 

 

오른 손에 부엉이를 안고, 파자마와 로브를 입고 있는 소년(<요란한 자장가>, 캔버스에 유채, 162.2×130.3cm, 2018),과 노란색 커튼 뒤에 살짝 몸을 가린 또 다른 소년이 등장하는 정태후의 <호텔>은 다른 듯 같은 인물처럼 보인다.(<호텔>, 캔버스에 유채, 162.2×130.3cm,2020) 프라다의 디자인에 영감을 받은 파자마와 로브 스타일의 상의, 자주색 하의와 흰색 상의를 걸치고 몽상에 젖은 청년은 마치 나르키소스((Νάρκισσος, Narcissus)처럼 자신을 한껏 과시하는 분위기를 드러낸다.

<요란한 자장가>에는 촛대와 괘종시계, 카펫이 등장하고, <호텔>에는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고양이, 자주색 슬리퍼, 초록빛 침대가 놓여있다. 그림 속 시간대는 밤이다. 보라색은 한색과 난색의 성격을 담은 밤의 시간대를 더 몽환적으로 보이게 한다. 강조색으로 쓰인 오렌지색은 유럽의 오래된 거리를 밝히던 가스등처럼 밤을 밝힌다. 작가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활용한 무수한 바로크의 그림들 속 빛의 색과 같이, 대낮처럼 명도와 채도가 높은 색이면서도 어둠과 함께 자주 보았던 ‘밤의 주황’을 내세웠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태후의 <요란한 자장가>전, <와일드 카드>전에서 보여준 소년의 인물화엔 잔뜩 멋을 부린, 마치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진 듯한 모습이 등장한다. 작가는 외부 세계에는 무관심한 듯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내면에 빠져든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시선을 내리깔거나 눈을 감겨 본능적으로 외부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부엉이, 고양이 등 설정된 동물들은 감상자를 응시하는 존재로 남겨두었다.

정태후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미소년들은 누구일까. 그 중 빈번히 등장하는 소년은 작가의 친동생이다. 작가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면 치기어린 젊은이가 사랑에 빠져 요동하는 그의 감성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그런 감성과 나 자신의 것이 주파수가 잘 맞아 떨어졌다. 이에 모든 것을 오로지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만 집중한, 예술적이고 감성적인 인물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이돌’ 문화의 세례를 받은 작가는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그룹으로 ‘샤이니(Shinee)’를 꼽았는데 2008년 경 고등학생일 때 작가가 좋아하는 그룹이 활동을 시작했다. 노래와 춤 실력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며 자란 탓에, 그림 속 소년들을 구현하는데 도움이 됐다. 한국 남성 아이돌그룹 멤버들은 대체로 수려한 얼굴과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그녀의 남동생과 공통점이 많았다. 청소년기부터 지켜봐 온 지적이고 영민하며, 감수성이 풍부한 ‘또래 남성’은 캔버스 위에 중성적인 분위기로 구현되었다. 캔버스에 투사된 이 이미지는 작가를 드러내는 일종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다.

그녀가 선호하는 소년의 초상은 작가 내면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작가는 “강렬하고 터프한 분위기는 그림을 그릴 때 강렬하고 터프한 분위기를 시각화하는 것을 추구하고 싶을 때가 많아 평소에는 숨겨져 있는 내 안의 ‘남성적인’ 면모를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순간마다 표방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그림 속에서조차 자신이 여성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왔다. 이런 남동생 또래의 소년들은 ‘요란한 자장가’, ‘밤에 마시는 수박주스’, ‘미완된 밤의 식사’, ‘눈겨울’, ‘서글픈 속도의 식사’에 표현되었다. 그들은 캔버스에 박제된 채로 영원히 아름다운 젊음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마치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속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처럼. 눈을 감거나 먼 곳을 보는 이 소년들의 눈빛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멜랑콜리한 밤의 분위기와 지극히 사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아이돌 문화의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와 함께 동시대 문화적 맥락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엔 늙어가는 초상화가 등장한다. 관능, 악에 탐닉한 도리언은 이런 갈망을 품는다. “얼마나 슬픈가! 나는 늙어 무섭고 흉측한 모습으로 변하겠지. 그런데 이 그림은 항상 젊은 상태로 남을 것이 아닌가.(중략) 거꾸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영원히 젊은 상태로 있고, 그림이 늙어간다면!”(_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중/윤희기 역 열린책들)

그레이는 화가 버질의 초상화를 통해 ‘미’에 대한 선망을 쾌락주의자 헨리 워튼 경을 통해 ‘미의 권력’에 대해 눈뜬다. 초상화는 늙고 추악해져가는 반면, 현실 속 도리언은 변함없이 그리스신화의 미소년처럼 숭배 받는다. “그레이 씨,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얼굴을 지녔고. 그렇게 인상 쓰지 마시오. 그 잘 생긴 얼굴에. 미(美)는 천재성의 한 형태지요. 실제로는 천재성보다 더 지고한 것입니다. 미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중략) 미는 그 미를 지닌 사람을 군주로 만듭니다.”

도리언을 숭배하는, 도리언이 숭배했던 ‘미’는 ‘추’의 반대편에 서서 우리의 눈을 붙잡아둔다.하지만, 인물 초상은 언젠가 사멸할 우리의 운명을 붙잡아 둔다는 의미에서 비극성을 내포하고 있다. 초상은 주술적이다. 강렬한 욕망은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흔든다.

<요란한 자장가> 속 술병과 와인 잔들, 사슴 머리를 장식해둔 모습은 <칵테일과 악타이온> 으로 이어진다. 이번 <와일드 카드> 전시에서 선보인 ‘개’ 초상 시리즈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사슴으로 변하는 악타이온과 주인을 물어 죽인 사냥개들의 비극에서 착안했다.

그리고 악타이온의 모델은 그녀의 남동생이기도 하다. 남동생은 <와일드 카드>전에 보여준 ‘동생의 보석’과 술병에 그린 ‘동생의 원석들’, ‘다이아몬드’ 외에 <My Little Brother>연작에 연이어 나타난다. 그녀의 페르소나인 남동생은 다양한 상상의 공간에서 마치 배우처럼 무대에 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히 임하고 있다.

포트리트(portrait)는 라틴어 ‘프로트라헤레(protrahere)가 기원으로 ’드러내다‘, ’앞으로 끌어내다‘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의 초상들은 정태후의 또 하나의 자화상인 셈이다.

‘개’ 초상 시리즈는 인터넷상에 도메르만, 달마시안, 사냥개 등의 키워드를 입력한 후 추출한 이미지들에서 출발했다. 개의 초상은 마치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카리스마 있는 위엄과 귀족적이며 위엄을 과시하고 있다. 장엄하거나(‘백열’) 사이버 상의 개와 같기도 하고(‘헤라클레스’), 어두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개(‘하데스의 개’) 역시 개의 개성과 성정이 드러난다.

“각각의 사진이 찍혔던 실제 개들은 현재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유령과 같이 느껴졌다. 유령인 주제에 나름의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나중에 그려질 나의 회화와도 이미 닮아 있었다.” 작가노트에 적힌 ‘유령’이라는 단어는 작가의 회화관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진정한 초상이란 단순히 그 외형적 껍데기를 묘사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혼을 담는 것이라는 전신사조(傳神寫照)에서 큰 인상과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도리언을 그린 화가 버질의 생각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그린 화가 버질은 완벽한 모델을 앞에 둔 화가로서의 경탄 외에도 오히려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다. 초상화엔 도리언을 진심으로 아끼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요란한 자장가> 작품 속엔 마치 해리포터 시리즈의 편지 배달부인 부엉이를 연상하게 만드는 흰 부엉이를 등장시킴으로써 신화적인 분위기는 더 강화된다.

<와일드 카드>전에서 선보인 ‘개의 신’, ‘’숲의 정령‘에서는 개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반면에 청년 악타이온이 사슴으로 변한 개와 사슴을 합성한 작업인 ‘개와 사슴 사이’는 구체적 형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악타이온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목욕하는 아르테미스를 보다가 그녀의 분노를 산다. 아르테미스는 물을 뿌려 저주했고, 악타이온은 수사슴으로 변해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50마리의 사냥개에게 쫓겨 죽음에 이른다. <개와 사슴 사이>에서는 악타이온과 우정을 나누었을 법한 개와 사슴으로 변한 악타이온이 합해지면서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고 있다. 둘을 하나의 얼굴로 합침으로써 마치 신화 속 상상의 괴물, 혼합체를 구현함으로써 강렬한 비극적 드라마를 완성해내고 있다.

작가의 인물 초상은 투사 이외에 상상과 기억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넘나든다. 영국 유학시절에 진행했던 프로젝트성 작업 중 매일 길에서 마주치는 첫 번째 사람(남성)을 기억했다가 작업실에서 초상을 드로잉, 회화로 표현하는 <Mr. Monday, Mr Tuesday, Mr. Wednesday... Series 연작과 ‘소용돌이’도 이 접근법을 선택했다.

<소용돌이>는 노란 빛의 밝은 색감들부터 순차적으로 시작해 어두운 색조의 얼굴들로 완성한 초상을 보통은 남성으로 인식하는데 정작 작가는 중성적인 얼굴을 그린 것이다. <개와 사슴 사이>처럼 여성과 남성의 얼굴이 혼합되었다. 작가는 이런 표현을 하기 위해 색상들을 활용하는 순서와 방식을 ‘역그리자유’라 명명했다. 그리자유(그리자이유, grisaille)는 언더페인팅으로 초반에 작업한 후 유채색을 덧입히는 채색방식인데 작가는 역방식을 선택했다.

<소용돌이> 이후 작업한 <Mr. Monday .....>는 특정 모델이 없는 초상으로부터 특정한 모델이 있는 초상으로 변화되었다. 유화와 수채, 드로잉으로 진행된 작업으로 하루 중 길에서 가장 처음 마주친 인물(남성)의 모습을 기억했다가 얼른 작업실로 돌아가 기억 속 그 모습을 그려가는 방식이다.

인터넷에 유령처럼 떠도는 개의 이미지를 수집해 초상을 그리는 행위, 우연히 만난 남성의 얼굴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종의 주술과 같은 행위다. “회화는 내게 더없이 매력적인, 때로 ‘마력’을 지닌 존재다. 넘쳐나는 정보와 이미지, 경계가 허물어져 무수한 형태로 존재하는 예술의 시대에 그림은 그저 물감이 만든 하나의 환영임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자주 그림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기이한 생명력을 느낀다.”

회화 매체에 대한 믿음을 작가는 기꺼이 ‘마력’이라고 부른다.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는 고대 그리스의 도공 부타데스의 딸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연인의 얼굴에 램프 불빛을 비추어 벽에 그림자를 만들고는 그 그림자의 외곽선을 따라 그림을 그렸다고 기록했다. 회화의 기원이라 알려진 이 이야기는 이제 신화가 되어 버렸지만, 그리스 이전에 이집트에서는 벽화 그림을 통해 이미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회화’는 재현의 의미 외에 환영과 실재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 작가는 디지털미디어 시대의 회화의 운명을 여전히 믿고 있다.

그가 그린 수 백개의 얼굴들은 어디선가 마주쳤을 기시감을 선사한다. 작가는 초상화를 통해 지속되는 실존을 다룬다.



 

*유월의 오늘

제목 유월의 오늘은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도리언이 영원히 젊기를 소망하는 ‘현재’를 상징한다.

 
 

천수림

비평, 전시기획, 편집자로 활동 중이다.

월간 <사진예술>편집장, 서울사진축제 프로그램디렉터를 지냈다.

이외에 <월간미술>, <아트나우>, <미술세계>, <아트인컬처> 등 미술잡지에 비평을 기고했다.

<지하관측소; 여기는 알레프>, <어나더, 나쁜, 세카이>,

이동근 개인전 <아리랑예술단:유랑극장>, <크랙; C-R-A_C-K>,

안옥현 개인전 <뤼야 ; Say Love Me> 전 등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