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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인터뷰#1 정태후 작가

 

진행 천수림(데이즈아트 편집장)

Q

현재 장욱진시립미술관 777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 중이다. 지난해 11월 777레지던스 릴레이 개인전 <와일드 카드>(양주시립창작스튜디오 갤러리777)를 개최했는데 어떤 전시였는지 소개해달라.

주로 개를 소재로 한 ‘악타이온’ 동물 초상 시리즈와 호텔방 등 다양한 작업이 혼재되어 있는 개인전인데... 전시명인 <와일드 카드>의 의미와 현재 입주해 있는 777레지던시에 대한 간략한 소개도 해달라.

정태후(이하 '정'): 777레지던스는 경기도 양주 시에 위치하며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의 산하로 운영되고 있다. 2020년 연초 레지던시 공모에 지원하여 선정된 감사한 기회로 이 해 6월부터 5기 작가인 7인 중 한 명으로서 입주하게 되었다. 입주 작가로서는 2021년 연말까지 활동하게 된다. 입주 작가들은 작업실 공간과 설비 등 작업 제반 시설과 미술관의 여러 프로그램을 지원받는데, 2020년 11월, 세 번째 개인전인 <와일드카드> 는 5기 입주작가 릴레이 개인전의 일환으로 개최된 것이다. <와일드카드> 전의 제목은 잘 알려져 있는 동명의 스포츠용어에서 착안한 것이다. 와일드카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지만 특별한 방법으로 출전이 허용되는 선수나 팀을 의미하며, 주로 대회나 경기의 주최 측에서 선정하여 참가할 수 있는 혜택을 부여한다. Covid-19의 확산으로 비대면문화가 급속히 대두되어 이전까지 가장 우선적으로 여기던, 감상자가 전시장에서 작품을 대면하는 방식의 전시의 발판이 위태로워져 그 다수가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상황을 경험 또는 목격하였고, 영상 송출 등 온라인 전시방식 등을 먼저 고민하게 되는 상황이 큰 화두라는 생각에서, 와일드카드를 발동하여 어려움 속에 현장 전시를 진행한다는 의미를 포함했다.

또한, 포커 용어에서 와일드카드는 조커와 같이 다른 카드의 역할을 대신하거나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만능 카드를 의미한다. 회화는 내게 더없이 매력적인, 때로 ‘마력’을 지닌 존재다. 넘쳐나는 정보와 이미지, 경계가 허물어져 무수한 형태로 존재하는 예술의 시대에 그림은 그저 물감이 만든 하나의 환영임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자주 그림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기이한 생명력을 느낀다. 화면을 대하고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조커를 사용한 게임의 참가자처럼 회화적인 힘을 화면 위에 마음껏 발휘할 수 있음을 믿고, 회화라는 매체 자체의 힘 또한 굳게 믿는 나의 회화 관이 어느 정도 반영된 의미의 제목이기도 하다.

또, 이 전시를 환절기와 같이 꾸리고자 했다. 그 이전까지의 두 번의 개인전을 구성할 때는 뚜렷한 어느 계절의 색채가 여지없이 보이도록 주제와 그림들을 해당 시기의 것으로 한정했었다. 반면, 와일드카드를 발동한 마당에 이 전시에서는 신작 위주이지만 그간의 다양한 주제와 소재, 그림을 구현한 표현의 방식이 다른 그림들 일부도 혼재되어 있도록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다.

Q

주로 등장하는 개 초상 시리즈는 인터넷상에 도메르만, 달마시안, 사냥개 등의 키워드를 입력한 후 추출한 이미지들에서 출발한다고 들었다. ‘백열’, ‘레이지 선데이 모닝’, 두 번째 레드라이트‘ 등을 보면, 원색과 붓터치, 컬러감이 강렬하고, 귀족적이기도 하다, 강렬한 주조색을 선택할 때 고려한 점, 작업을 하며 드러내고 싶었던 점이 있다면?

정: 개들에게 사람이 투영시킬 수 있는 상은 매우 많을 것이다. 존중, 순수, 사랑스러움, 귀여움, 그리움, 충직함, 무서움, 연약함, 동정, 연민, 불안함, 책망, 억압 등등. 그 많은 품성들 중에서 나는 해당 개 연작에서 개의 캐릭터를 카리스마 있는 인물과 같이, 위엄을 과시하는 위압감 있고 격조 있는 모습으로 시각화하고 싶었다. 때로 장엄하며(‘백열’) 사이버 상의 개와 같기도 하고(‘헤라클레스’), 어떤 어두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개(‘하데스의 개’) 등등 전반적으로 인간적인 감정을 지니되 성정이, 또 시각적으로도 힘이 넘치는 존재들로 표현하고 싶었다. 이러한 것들을 시각화하기 위하여 화면 전체를 아우르는 존재감이 포악한 색깔들 사이로, 개의 형상을 만드는 붓질의 움직임이 그대로 보이도록 그렸다.

Q

<와일드 카드>전에 등장하는 ‘개’ 초상 시리즈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사슴으로 변하는 악타이온과 주인을 물어 죽인 사냥개들의 비극에서 착안했다고 들었다. ‘악타이온 신화’ 서사에 흥미를 느낀 이유와 출발점에 대해 설명해 달라.
‘개의 신’, ‘’숲의 정령‘ 은 구체적인 형상이 드러나는 반면에 청년 악타이온이 사슴으로 변한 개와 사슴을 합성한 작업인 ‘개와 사슴 사이’는 구체적 형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화학작용을 일으킨 것처럼... 변하는 그 순간, 찰나의 시간을 담은 것인가?

정: 개인적으로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비정한 주인 쪽 보다는 버려진 쪽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되어 마음이 아픈 느낌이다. 어려서 처음 이 신화를 읽었을 때에는 사냥개가 주인을 물 수도 있다는 것에 큰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다시 읽었을 때는 사냥꾼과 공통된 목표를 지니고 항상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란히 뛰었던 사냥개의 습성이 결국 서로를 향해 충돌해버려 둘 모두 비극적 운명의 희생자로서 같은 입장이라는 부분이 마음을 울리게 만들어 그림의 소재로 착안하게 되었다. 
<개와 사슴 사이>에서는 이 스토리의 등장인물들로서의 역할, 비극적 결말과 주종관계를 넘어서 끈끈한 교유와 관계성이 있었을 두 존재를 하나로 합성하며 새로운 의미와 시각적인 재미를 꾀하고 싶었다. 이 이야기 속의 핵심 동물들인 개와 사슴은 외형적으로도 매우 상이하기 때문에 둘을 하나의 얼굴로 합쳐, 마치 상상 속의 괴물처럼 강렬한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회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어떤 시간적 지점이 융해되었다가 화면 속에 다시 응결되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라, 개가 주인을 무는 비극의 그 찰나를 초상의 형식으로 바꾸어보면 어떨까 상상했던 것이기도 하다. 확실히 ‘개와 사슴 사이’는 전자의 작품들보다 ‘추상적으로’ 구현되었다. 그런데 이는, 창작하는 방식 즉 그림을 그리던 때 시각적으로 참고한 소스가 있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의 차이도 크게 작용한 결과라 생각된다. ‘개와 사슴 사이’는 상상속의 것을 그리는 관념적인 접근이었다면, 전자의 그림들은 물론 상상력도 발현되었지만 인터넷 속을 활보하는 개들을 내 화면으로 데려오면서 변화를 주었다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그러한 차이가 보이는 것이다.  

Q

작업노트에 이런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각각의 사진이 찍혔던 실제 개들은 현재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유령과 같이 느껴졌다. 유령인 주제에 나름의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나중에 그려질 나의 회화와도 이미 닮아 있었다.” ‘유령’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는 ‘생명력’이 강한 에너지를 말하면서 어딘가 힘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어쩐지 비극적이기도 한데... 자신의 회화관을 드러낸 말인가? 작가님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 꼽은 이유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정: 내 작업적 관심이 실재와 형상 사이의 지극히 인간적인 심리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주술적 의미를 담아 동굴 깊숙한 내벽에 그린 구석기 인류의 벽화의 창작 동기, 사극에서 사람 형상으로 만든 짚 인형에 누군가의 이름을 쓰고 바늘을 무수히 찔러 넣은 저주를 볼 때 끔찍하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것 말이다. 그냥 하나의 이미지이며, 물리적인 무엇일 뿐인데. 이러한 심리에 대해 곰브리치는 ‘인간의 미개성’ 때문이라 파악했다-(한명식(2011), <예술을 읽는 9가지 시선>, 청아출판사, 142.)-.  거칠게 내 그림과 연관지어보면, 내가 영혼을 그리고자 애쓰지 않아도, 단순히 재미로 어떠한 초상 작업을 실재 대상에 대한 낭만적인 의미 없이 행한다 해도, 그 그림에서의 어떤 부분은 불가피하게 대상 자체와 동일시하게 되는 지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그저 하나의 이미지일 뿐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림 속 인물이나 개가 마치 곧 움직일 것만 같이 생동감과 에너지를 내뿜는다는 생각이 들고, 이미지에 어떠한 생명력을 느끼거나 실재의 그림자라도 된 듯 연관 짓게 되는 자연스런 인간의 심리는 보고 싶지 않아도 보여 나를 놀래키는 유령과 같이 영향력을 발휘한다.
작업 과정에서 인터넷 상에 검색하여 나열된 개들의 이미지 중 하나를 골라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실제 개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죽었을까 살았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그 특정 개와 어떠한 교유도 없이 ‘모르는’ 개였기 때문이다. 그 개의 일생과 그 모습들을 상상하는 것이 유령의 형상들과 같이 머릿속을 채우게 된다. 죽으면 끝이지, 그 유령의 형상 하나는 디지털적 픽셀들의 합인 이미지 파일의 모습으로 그 공간을 영원히 떠돌게 된다는 점도 귀신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 사진을 매개로 하여 주관적으로 어떠한 특질과 캐릭터를 표현하는 그림으로 완성하고 나면, 사진 속의 남의 개가 ‘나의 개’로 변모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필요 이상 자기 표현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나, 내 안의 어떠한 심리와 특질들을 투사하여 그린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 소설 속 초상은, 도리언의 시간이 흘러갈 때마다 또 그가 악행을 일삼을 때마다 그 무게를 주인 대신 감당한다. 이렇게 되면, 먹고 마시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육신 도리언이 실제 도리언인가, 그 삶의 궤적을 모두 짊어지는 그 초상화가 진정 도리언인가?
여기에 덧붙여, 나는 진정한 초상이란 단순히 그 외형적 껍데기를 묘사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혼을 담는 것이라는 전신사조에서 큰 인상과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간 내 작업의 주제가 ‘그 대상의 혼을 담아야 한다’ 였다는 말은 아니다. 이는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그런 것보단, 창작자로서 전신사조 사상에서 이야기하는 초상에 대한 철학적인 면을 흡수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맥락에서 늘 대표적으로 꼽히는 윤두서의 자화상을 볼 때마다 머릿속으로 도리언의 초상을 함께 상상해보곤 했는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결국 동양의 전신사조와도 일부 그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아 인간의 이미지와의 관계와 심리를 폭넓게 다룬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Q

<와일드 카드>전에 전시된 작품 중 ‘바우하우스’는 또 다른 작품인 <밤의 신화와 개들>에 다시 등장하기도 하고, <호텔> 등에서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이 등장하고, 전시장에서는 벨라스케스의 말이 등장하는데, 어떤 연유가 있는 것인가.

정: 분명 어떤 상징이 될 수 있는, 특정한 의미와 맥락을 전송하는 이미지들이 그림과 전시에 등장하고, 사라졌다 재등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러한 일을 벌였던 수많은 작가들은, 그 중 고흐의 경우를 보면 자신의 특정 그림을 다른 그림 속에 등장시키기도 하고 영향을 많이 받았던 우키요에 등을 그림 속에 삽입하는 것과 같이 다른 그림을 바로 차용해 오기도 하였다. 보는 사람들에게는 해당 작가의 그 당시 어떤 관심에 대한 단서로서 작용해줄 것이다. 아는 무엇에 대한 친근함과 더불어 감상과 해석의 재미를 배가시켜줄 것이다.
존 버거는 그의 책 <Ways of seeing(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유화의 시점은 항상 ‘현재시제’라고 하였다. 보고 있는 것을 재현한 그림이든, 머릿속의 상상을 그리는 것이든 화가는 항상 현재 ‘보이는 것’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맥락에서 생각해볼 때, 어떤 그림을 보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는 항상 다채로운 문학적 경험을 하게 된다. 현재시제로 여러 시공간을 보게 된다. 발화자의 입장으로는 여러 가지 맥락과 배경을 지닌 단서들을 그림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흥미로운 장치들을 구사하는 것과 같기도 하다. 청자들은 그러한 장치들을 맞닥뜨리고 순식간에 각각의 경험과 배경과 지식을 통한 각기 다른 새로운 상상의 차원을 이끌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는(선생님이) ‘호텔’ 속 검은 고양이를 보고 애드가 앨런 포의 벽에 숨겨져 울음 소리를 내는 고양이를 떠올리듯. 이러한 지점에서 다양한 상징을 담을 수 있는, 특정한 맥락이나 상상을 Ctrl + V할 수 있는 흥미로운 대상들을 화면에 출현시키고 출연시켜 회화로서의 문학성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동일한 이미지를 다채로운 방식으로 등장할 수 있도록 구현하는 것은 재미있는 시각적 도구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고민하고 발전시킬 여지가 풍부한 전략이라고 생각해보았다.

Q

노란색 커튼 뒤에 앉아 있는 청년을 그린 <호텔>을 보면 어린 남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던 그리스 신화의 시대를 소환하는 느낌이 든다. 미소년을 숭배하던 인류의 오랜 역사가 있는데 사실 최근 한국의 문화 중 ‘아이돌’과도 맥락이 닿는 느낌이 든다. 
작가님은 아이돌 문화와 함께 성장한 세대인데... 이런 현상은 극히 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요란한 자장가’, ‘밤에 마시는 수박주스’, ‘미완된 밤의 식사’, ‘눈겨울’, ‘서글픈 속도의 식사’라든가 그림 속 소년의 모습이 대체로 아름답다... 아이돌문화의 세례가 아닐까? 우연은 아닌 것 같은데? 

정: ‘아이돌’ 문화를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가장 좋아하는 그룹인 ‘샤이니(Shinee)’가 활동을 시작한 2008년에 나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요새는 흔한 일이지만 그 때의 나보다 어린 나이인 중학생도 아이돌 가수로서 데뷔한 것에 충격에 가까운 인상을 받기도 했다.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은 철저하게 기획되어 만들어지고 발표되는 것임을 당연히 인식하고 있고 그 점에 기인해 사람들의 비판적인 시선으로는 공장에서 양산하는 상품과 같이 비교되기도 하지만, 점점 스스로 작사 작곡 등 음악을 창작하는 아이돌 멤버들이 즐비해져 능동적인 인상도 담아내고 아이돌 그룹의 수명이 늘어나는 등 아이돌들 자체가 다양하게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며 아이돌 문화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믿어왔다. 그저 어여쁘고 해사한 외모만으로 인기를 끄는 것이 아닌, 노래 실력과 춤 실력을 바탕으로 각 앨범이 표현하고자 하는 컨셉에 맞추어 변화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지켜보며 자랐기 때문에 동일한 인물이 어떤 태도와 어떤 스타일링을 하느냐에 따라 음악의 주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매력을 크게 느껴 아이돌 그룹들의 행보에는 늘 관심을 지니고 지켜봐 왔던 것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구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한국 남성 아이돌그룹 멤버들의 대체로 수려한 얼굴과 호리호리한 체형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남동생과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되어, 청소년기부터 쭉 지켜봐 온 ‘또래 남성’의 한 이미지로 그려지고, 지적이고 영민하며 감수성이 풍부한 인물, 중성적인 분위기를 담을 수 있는 인물로 구현하고자 했던 그림들이기에 자연히 그러한 영향들을 반영하게 되었다.
사실 자주 그림 속의 소년들에게 나의 모습을 투사하기도 한다. 내가 그림 속에서까지 여성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며, 그림을 그릴 때 (소년그림 포함한 작업 전반적으로) 강렬하고 터프한 분위기를 시각화하는 것을 추구하고 싶을 때가 많아 평소에는 숨겨져 있는 내 안의 ‘남성적인(언급한 시각 표현들을 이런 이분법적 형용사로 가둬놓는 것도 촌스럽지만.)’ 면모를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순간마다 표방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Q

소년, 혹은 청년을 소재로 한 작업은 어떻게 발전되었나? 이런 관심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게 <요란한 자장가>인 것 같은데 특히 심야시간 대의 감성에 집중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는데, 자신의 내면에 빠진 청년들을 그리는데 있어 주안점을 둔 것이라면? 주색조 선택, 패션, 부엉이, 소품 등 특징을 설명해 달라?

정: 인물화에서부터 소년 그림들의 발전 과정과 최근의 동물 연작 등 작업의 꾸준한 공통점으로는  소설가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개성과 특징을 만들어내고 드라마나 영화 작가가 작품 속 등장인물들에 어떤 모습을 부여하는지에 따라 그를 연기할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과 흡사하게 그림의 주제를 표현해줄 등장인물의 특성을 만들고 소재를 ‘캐스팅’하는 방식처럼 느꼈다는 점일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면 치기어린 젊은이가 사랑에 빠져 요동하는 그의 감성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그런 감성과 나 자신의 것이 주파수가 잘 맞아 떨어졌다. 이에 모든 것을 오로지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만 집중한, 예술적이고 감성적인 인물을 표현하고 싶었다. 심야의 감성은 누구나 느껴보았을 것이고, 나 또한 빈번히 겪어본 강력한 것이어서 그림 속의 시간대로 설정하였다. 심야의 색으로써 몽환적이면서 한색/난색의 특징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보라색을 배경색으로 자주 활용하였고 특히 보라와 어울리리라 생각했던, 포인트 색상으로 활용된 오렌지색은 작업 시 즉흥적으로 선택하여 그려진 것이기도 하지만- 암흑 속 백열등과 같이,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활용한 무수한 바로크의 그림들 속 빛의 색과 같이, 대낮처럼 명도와 채도가 높은 색이면서도 어둠과 함께 자주 보았던 ‘밤의 주황’을 내세웠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패션과 소품은 그 자체로 밤의 시간대를 구현하기에 적절하면서도 인물이 지적이고 섬세하며 감성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을 고르고자 했다. 베르테르를 연상하며 서구의 파자마와 로브 스타일, 그리고 촛대와 괘종시계, 카펫 등을 선택하였고 특히 파자마 패턴의 표현에 공을 들인 하의는 럭셔리브랜드 프라다의 제품을 참고한 것이다. 감정에도 마음을 빼앗겼지만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에도 매료된 자기애스러운 면모로, 외면과 내면을 잔뜩 멋 부린 젊은이의 모습을 구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빠져든 인물을 표현하고자 외부(그림을 보는 감상자)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음을 시각화하는 방식으로 인물의 시선을 내리깔거나 눈을 감겼고, 부엉이 등 본능적으로 외부를 경계하는 모습으로 대비시키고자 설정된 동물들은 인물과 반대로 또렷이 감상자를 응시하는 존재로 그렸다. 물론, 신비스러운 느낌을 전달하는 동물로서 부엉이를 고른 것에 해리포터 시리즈의 편지 배달부인 부엉이들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자명하다. 덧붙여, <요란한 자장가> 속 술병과 와인 잔들, 그리고 사슴 머리를 장식해둔 모습을 보면 이후의 그림인 <칵테일과 악타이온> 에서의 악타이온 모델이었던 남동생의 한 면모와 사슴의 존재가 공명하고 있어 그 연결지점들이 스스로 재밌다고 생각하고 있다.

칵테일과 악타이온(2018)

동생을 그린 그림들.

Q

작은 <My Little Brother>연작과 <와일드 카드>전에 보여준 ‘동생의 보석’이라는 그림과 술병에 그린 ‘동생의 원석들’, 초상 ‘다이아몬드’를 보면 물론 제목 때문이기도 하지만, 따뜻한 애정이 느껴진다. 동생이 작가님의 그림에 모델로 자주 등장하기도 하면서, 작가님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일종의 페르소나로 상정된 게 아닌가 싶다. 어떻게 생각하나?

정: 동생과 나는 참 다른 사람이다. 얼굴 생김은 닮았으나, 살아온 행보와 삶의 태도와 경향, 성격 등 거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 가끔 수업을 땡땡이치는 정도의 일탈 외에는 진지하고,  착실한 모범생에 가까웠던 나와 대조하면 동생은 자주 반항적이었고 순간 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내향적이지만, 동생은 외향적이며 통이 크다. 어떤 면들은 나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느낌이다. 우리가 우애가 좋은 것과 별개로 내 생각에 동생과 나는 서로를 평생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동생이 내가 지닌 모습과 흡사한 성격으로, 비슷한 생각과 언행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언급하신 그 ‘페르소나’와 같은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 없는 모습, 나와 다른 면모,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그 애는 갖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호기심 같은 것이 항상 있어왔던 것 같다. 

<Mr. Monday, Mr. Tuesday......> Series (2016) ↑

​<소용돌이> 연작(2014-2015)  ↓

Q

영국 유학시절에 진행했던 프로젝트성 작업 중 매일 길에서 마주치는 첫 번째 사람(남성)을 기억했다가 작업실에서 초상을 드로잉, 회화로 표현하는 <Mr. Monday, Mr Tuesday, Mr. Wednesday... Series 연작에 대해 설명해 달라. 
초상작업 ‘소용돌이’도 함께 설명해 달라. '윈체스터' 프로젝트의 우연성과 ‘소용돌이’는 초상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접근법은 상이하다.

정: <소용돌이> 연작은 2014년부터 2015년 상반기까지 진행했던 초상 작업으로, ‘어둡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의 고통스런 감정을 머릿속 인물들의 일그러진 얼굴들을 통해 표현했다. 머릿속 인물이라 함은, 그림을 시작할 때 누군가의 상을 재현하거나 참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게 빈 작은 화면을 대하고, 간단한 드로잉으로 스케치를 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곧바로 붓질을 시작해 낮은 명도와 채도의 어두운 색감으로 얼굴 모습으로 빠르게 완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때 하나의 단위로서의 붓질은, 얼굴의 구성요소를 모호하게 재현하기도 하며 조형 요소인 붓질 그 자체로도 보이는 이중적인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러한 표현에 스스로 흥미를 깊이 느껴 이전부터 매료되어 있었다.(2010년대 초반의 인물화 그림들)
얼마 전, 유화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작화 기법 중 하나인 그리자유(그리자이유, grisaille)를 두고 생각해본 일이 있는데, 르네상스 시대에도 풍부하게 활용된 이 작화방식은 화면 전체적으로 회색 톤이나 채도가 매우 낮은 톤의 갈색 등 하나의 어두운 톤만을 활용해서 대상의 밝고 어두움을 표현하여 화면에 입체감을 만들어내는 기법이다. 주로 언더페인팅으로써 초반에 작업한 후 유채색을 덧입히는 채색의 방식으로도 많이 그려졌던 것이다. <소용돌이> 연작은 색상들을 활용하는 순서와 방식이 역그리자유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적으로 노란 빛의 밝은 색감들부터 순차적으로 시작하여  결국은 어두운 색조의 얼굴들로 완성되었던 까닭이다. 나는 중성적인 얼굴들이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남성들의 얼굴 초상으로 본다는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Mr. Monday .....> 연작은 <소용돌이> 이후, 특정 모델이 없는 초상으로부터 특정한 모델이 있는 초상으로의 변화를 꾀하고자 시도한 작업이다. 막연하게 누군가의 얼굴들을 계속 그려나가는 방식도 흥미롭지만, 화면 속에 정확한 어떤 캐릭터가 있는 인물들을 그려보고 싶었다. 언급하신 다른 종류의 ‘우연성’을 잃고 싶지는 않았고, 누군가의 얼굴을 그릴지 모르는 상태로 나름대로의 규칙을 만들어 실행했다. 하루 중 길에서 가장 처음 마주친 인물(남성)의 모습을 기억했다가 얼른 작업실로 가 기억 속 그 모습을 그려가는 방식이었다. <Mr. Monday .....> 연작은 유화도 있었지만 수채, 건성 재료를 활용한 드로잉의 성격이 더 컸다는 점도 <소용돌이>와는 작업 방식의 접근이 달라져 더 용이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매우 짧은 나날동안 진행되었던 작업이었는데, 그 방식과 형식을 두고 발전시켜 추후 다시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다. 

Q

‘호텔’작품을 보면 헤드폰이랄까. 담요, 개인의 취향을 짐작할 만한 소품과 검은 고양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등장한다. 이 작품 뿐만 아니라 벨라스케스의 화이트 홀스를 떠올릴 수 있는 ‘출격’이라는 작품을 보면 마치 벨라스케스에 대한 헌정처럼 느껴지는데, 벨라스케스를 소환한 이유가 있나.  

정: 거창한 의도로, 벨라스케스라는 미술 역사 속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을 소환하여 어떠한 미술사적 의의를 내 그림 속에 이끌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어릴 때에는 벨라스케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이 정말 명작이라는데, 나는 다른 거장들의 작품들에 더 끌렸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가 창작자로서 그림을 그려보면 그려볼수록, 벨라스케스에 대해 존경심과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솔직히, 시작은 단순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나의 필치로 그려보면 어떨까 그것뿐이었다. 벨라스케스는 그런 매력이 있는 화가일지도 모른다. 베이컨도 그의 교황을 소환하고, 피카소도 그의 시녀들을 소환해 색다른 명작들을 탄생시키지 않았나. 물론 나 역시 벨라스케스를 조금 그려보았다고 해서 희대의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뜻이라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건 낯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다만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내 화면 속에 그려보면서, 내 붓 터치로 바꾸어보면서 붓질 하나 하나마다 큰 재미를 느꼈다. 연관된 지점에서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프린트한 것을 붙이거나 하여 직접적으로 갖고 오는 방식보다 그림을 감상하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흥미롭게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시각적인 표현의 면에서는 이 작품들은 내게 유의미하고 좋은 성과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함부로 라면 함부로 그린 것일 수도 있다. 현재까지는 다른 거장들의 그림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서 벨라스케스를 그러한 이유는 무엇일지 깊이 숙고해본다면 아직 숨은 어떤 큰 의미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이런 작업을 해 본 이후인 지금으로서는 더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거장의 그림을 소환하는 일은, 쉽사리 다루지는 않을 것 같다.

Q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정: 최근작과 연관성이 계속 지속되면서도, 주제와 소재를 달리 한 신작을 창작할 것이다. 
가장 가까운 전시 계획으로는 2021년 3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의 777레지던스 입주작가 전시에 참여 한다. 
2020년은 Covid-19의 영향도 있었고, 내면 쪽에 집중한 한 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거나 자료를 찾아보는 등 혼자만의 방에서 시간을 정적으로 보냈다. 해가 바뀌어 한 달차인 지금도 그러한데, 작업이 담을 수 있는 의미가 좀 더 발전되어 깊이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갈 길이 너무나 멀다. 앞으로 나의 ‘작업 세계’를 구축하고자, 내 작업적 관심과 추구하는 바를 단단하게 정립해나가기 위해 길게 보고 노력할 것이다. 

천수림 (상기 인터뷰 진행자)
비평, 전시기획, 편집자로 활동 중이다. 
월간 <사진예술>편집장, 서울사진축제 프로그램디렉터를 지냈다. 
이외에 <월간미술>, <아트나우>, <미술세계>, <아트인컬처> 등 미술잡지에 비평을 기고했다. 
<지하관측소; 여기는 알레프>, <어나더, 나쁜, 세카이>, 
이동근 개인전 <아리랑예술단:유랑극장>, <크랙; C-R-A_C-K>, 
안옥현 개인전 <뤼야 ; Say Love Me> 전 등을 기획했다.

 © 2021 by Taehoo Jung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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