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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굴의 ‘표정’이, 사진이나 실제 인물의 얼굴을 보아도 결코 같을 수 없는, 회화에서만 접할 수 있는 방식인 물감의 물질성으로 발현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 나에게 ‘표정’은, 주제나 내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함에 있어 매우 핵심적인 요소이다.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방식이 아닌, 주관적인 표현의 붓질이 만든 전체적인 화면의 ‘표정’이 그림에서 중요한 요소이자 특징이 된다. 

여러 재료로 그림을 그려보고, 19세 때 유채 물감을 사용한 표현적인 인물 회화에 매료되었고, 지속적으로 창작한다.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무제>(2011~2013)연작에서의 표현적으로 그려진 인물 회화를 통해, 인물의 인상이 붓질이 만들어내는 회화의 조형 요소들로 치환되는 것에 흥미를 크게 느꼈다. 2014년부터 2년간 창작한 <소용돌이> 연작 회화 작업에서는 미리 계획 없이 화면을 대하고, 막연한 붓질을 시작하여 ‘얼굴’로 완성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 때 나는 ‘어두운’ 감정이라 말할 수 있는, 불안이나 답답함, 괴로움 등의 정서를 주제로 삼고 소재를 화면에서 얼굴 부분으로 한정하고, 인물의 표정을 통해 표현하였다. 그림들은 주로 34x24cm의 화면에 실제 두상 크기로 그려졌고, 인물들의 표정은 눈을 감고 불편한 휴식을 취하거나, 찡그린 인상으로 고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용돌이>연작의 ‘불특정 인물화’ 작업과 달리, 이후의 그림들은 자주 특정한 모델이 등장한다. 하나뿐인 나의 남동생이다. 막연하게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었던 ‘나의 감정’이 투영되어 그것을 빠른 붓질로 그렸다고 생각하는 전작과 비교하면 이 변화로 ‘남동생’이라는 특정 존재가 부각된 것이다. 불특정한 인물들을 빠르게 그려냈던 상상속의 인물 얼굴 연작으로부터 남동생이라는 특정 인물의 개성이 부여된 초상화적 요소를 부각한 변화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많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던 사람으로서 남동생의 얼굴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지표나 힌트를 제공하며, 그것으로 착안한 표정과 감정, 이야기 등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제작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던 작업이다. 늘 같이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한 그에 대한 총체적인 인상이나, 20대 청년으로서 그가 군 복무를 하게 된 것 등의 개별 사건은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그림 속의 남동생은 청춘의 불안과 반항 같은 정서와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한 표정, 슬픔이 느껴지는 눈빛, 고개를 떨군 치우친 얼굴과 같은 시각적 방식들과 함께 붓질의 물질성으로 표현되었다. 나와 얼굴이 매우 닮은 또래 남자인 남동생을 관찰하고 그리는 행위는 여성인 내가 나의 ‘남자버전’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만들었고, 남동생의 모습을 담은 그림은 확장된 자화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후의 인물 초상은 투사 이외에 상상과 기억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넘나들었다. 영국 유학시절에 진행했던 프로젝트성 작업 중 매일 길에서 마주치는 첫 번째 사람(남성)을 기억했다가 작업실에서 초상을 드로잉, 회화로 표현하는 <Mr. Monday, Mr Tuesday, Mr. Wednesday...> 연작은 유화와 수채, 드로잉으로 진행된 작업으로 하루 중 길에서 가장 처음 마주친 인물(남성)의 모습을 기억했다가 얼른 작업실로 돌아가 기억 속 그 모습을 그려가는 방식이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인물화 작업에 이야기적 요소를 결합하여 신화와 문학에서 착안한 등장인물들에 나와 남동생을 비롯한 주변인들을 투사하여 환상적인 화면을 구축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밤 시간 특유의 ‘심야 감성’에 빠져든 채 자신의 내면에 집중한 상태의 감성적인 청년들을 표현하였다. 이 작업은 <요란한 자장가> 연작으로, 그림 속에 등장한 청년들은 남동생의 외형적 특징과 어려서부터 줄곧 지켜보아 온 아이돌, 보이그룹 문화의 영향으로 영민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또래 남성’의 상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림 속 인물의 시선에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눈을 감거나 눈이 가려지도록 고개가 숙여진 상태의 인물들을 표현하여 인물의 시선이 관람자로부터 비켜가도록 그렸다. 자신의 내면에 빠져들어 외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무아지경의 상태를 표현하려 한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함께 등장한 동물들인 ‘부엉이’, ‘고양이’와 같은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외부에 관심을 두는 상태로 표현하였다. 그림 속의 표정과 시선을 통해 인물의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관람자가 인물의 두 눈동자를 볼 수 없도록 고개를 숙였거나 눈을 감고 우수에 찬 듯한 표정의 인물은 지속적으로 매력적인 소재가 되었다. 이런 초상 속 인물의 모습은 슬픈 듯, 감정에 취한 듯, 상처받은 듯, 자기애를 드러내는 모습인 듯 다양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청년 ‘악타이온’과, 아르테미스의 미움을 사, 사슴으로 변한 악타이온을 물어 죽인 그의 사냥개들의 비극으로부터 착안하여 등장인물들에 주변인을 투사하여 인물과 동물을 그리는 작업도 진행했다. 각 등장인물들의 의도와 행동에 전부 공감할 수 있고, 운명의 수레바퀴에 휘말려 비극적인 말로를 맞이하는 것을 보고 느낀 비애가 마음을 움직이고 아프게 했다. 그리고 악타이온의 모델은 또다시 남동생이다. 대표적으로 <칵테일과 악타이온>(2018)에서 직업이 바텐더인 동생을 악타이온으로 상정하여 표현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청년들이 등장하여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심야 감성을 표현했던 <요란한 자장가>(2018) 속 술병과 와인 잔들, 사슴 머리를 장식해둔 모습은 <칵테일과 악타이온>(2018) 으로 이어진다. 남동생은 ‘동생의 보석’과 술병에 그린 ‘동생의 원석들’, ‘다이아몬드’ 외에 <My Little Brother>연작에 연이어 나타난다. 나의  "‘페르소나’인 남동생은 다양한 상상의 공간에서 마치 배우처럼 무대에 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히 임하고 있다."('유월의 오늘', 2020, 글 천수림, 정태후 작가 평론글로부터) 

‘개 초상’ 시리즈는 악타이온의 이야기 속 사냥개들의 모습을, 인터넷에 ‘사냥개’, ‘도베르만’, ‘달마시안’ 등의 검색어를 입력해 나온 이미지들을 선별하여 주관적인 회화 표현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 과정에서 나의 감정이 개들에게 투영되어 시각화되었고, 위엄 있고 카리스마 있는 인물의 초상처럼 개들을 그리고자 했다. <백열>(2020)에서는 화면을 이루는 주조색을 Red로 하여 강렬하고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존재로 그린 것이다. 개 초상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지옥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로 표현하기도 하고, 피그말리온 신화를 읽고 곧 살아날 것 같은 조각상으로도 표현하였다. 


화면의 스펙터클을 꾀한 <7시 43분 48초의 과녁 위로 흐르는 모래들>(2021)의 경우는 악타이온 사후에 악타이온 동상 주위를 맴돌며 주인을 그리워하는 사냥개들의 신화적 요소와 흑사병이 유행했던 중세 유럽의 마카브르(Macabre)회화를 나의 방식으로 결합하여 동시대 팬데믹 이슈를 고전적이고 신화적으로 재해석했다. 

종합하여, 201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나의 회화 작업을 지속적으로 관통해온 핵심적인 표현의 요소는, 인물의 근육이나 이목구비의 구성 요소로 보이도록 만들기도 하고 시원한 붓질 그 자체로도 보이는 이중적인 기능을 넘나드는 붓질로 회화적 힘을 부각하는 시각적 표현의 인물화를 구현하는 것이다. 춤추는 듯 역동적 움직임과 신체적 움직임이 보이는 붓질로 그려내는 인물의 형상, 순간적이고 추상적인 감정을 가시적이고 물질적으로 표현하는 그림의 ‘표정’이다. 이것에 감정을 표현하고자 주관적으로 선택한 강력하고 선명한 색채를 결합하여 이루는 화면은 진정한 회화적 힘의 원천에 대해 고민하게 해주어 매우 중요하고 흥미롭다. ‘나다운’ 그림의 요소는 무엇일까 더욱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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