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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끓어오르는 피를 진정시키기 위해 얼마나 자주 자장가를 불러야 했는지 모른다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저, 안장혁 역,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문학동네, p.16
괴테는 스물 다섯 살이던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상처받은 여린 영혼을 지닌 지적이고 감성적인 젊은이를 창작해냈다. 소설 속 베르테르의 여러 품성은 내가 해당 회화 연작을 창작함에 있어 중요한 모티브이다. 인용한 대목에서 나는 본 연작을 아우르는 주제와 키워드를 착안했다. 베르테르는 그의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장가가 필요하다고 했으나, 때론 청년의 감성은 자장가와도 같이 현실을 꿈으로 탈바꿈하고 자기 자신의 내부로 빠져들어가는 요란한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그 자신의 감정에 깊이 들어가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감각과 감성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오롯이 집중하여 자신만의 내•외부 세계를 꿈꿀 소중한 자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최근 회화들이 재현하는 시간은 주로 밤이다. 시끄러운 낮과는 다른, 온전히 홀로 사색에 젖어들 수 있는 평온한 시간, 그러면서도 마치 거대한 사건의 서막을 알리는 검은 막의 무대 뒤 편. 나는 밤에 느낄 수 있는 특정 감정의 상태와 특유의 감성을, 소년 또는 청년들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삼아 표현하고자 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 웃고 떠드는, 명랑하고 즐거운 낮이 지나가고 밤이 오면 낮 시간에 살았던 사람과 동일인이란 게 이상할 정도로 낯선, 스스로의 감성에 푹 빠져든 시인만이 남는다. 우수에 젖어 불안하고, 알 수 없고(미지), 열정적이고 욕심 많고, 때로 모든 것에 초연한. 복잡하고 모순된 상태가 들이닥친다. 낮이었다면 낯간지럽고 멋쩍을, 유치하고 노골적인 감정도 밤의 옷을 입으면, 다소 차가운 밤공기에도 소년들의 연약한 맨 살을 감쌀 완벽한 가운(gown)이 되어줄 수 있다. 혼자만의 깊은 시간, 그리고 토닥토닥 어루만져주는 손길 같은 느린 곡조의 노랫소리. 그로 인해 찾아온, 선잠이 들었는지, 꿈속인지 모를 몽롱한 상태의 감각. 곁에 무엇이 있더라도 온전히 혼자서 빠져드는 자기 자신의 존재와 부재.
나는 인간의 여러 면면들 중, 자기 자신의 감성에 빠져들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인간만의, 그리고 가장 인간적인 면모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화면에 다소 우울하거나 감성적으로 빠져들어 현실과 주변에는 마음이 멀어져 무관심한 소년들과는 대조적으로 날카롭고 본능적인 상태로 관람자를 직시하는 부엉이와 고양이 등의 동물들을 표현했다. 어떤 대상을 바라보거나 관찰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관심이 있다는 의미이다. 내가 그린 인물들의 시선은 내리깔려 있거나, 초점이 흐려져 있거나 눈이 가려져 있다. 외부 또는 관람자를 향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많은 경우, 그림 속의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직 그들을 감싸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에게 발생된 밤의 감정뿐이다.
그간의 작업을 아우르는 동기(motive) 와 앞으로의 창작 계획
인물의 ‘감정’을 거친 붓질과 물감의 물질성으로 시각화하는 것은 내게 지속적으로 중요한 표현 주제이다. 2014년과 2015년의 그림들은, 미리 계획 없이 화면을 대하고, 막연한 붓질을 시작하여 ‘얼굴’로 완성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 때 나는 ‘어두운’ 감정이라 할 수 있는, 불안이나 답답함, 괴로움 등의 정서를 주제로 삼는 것에 매료되어 그것을 화면에서 얼굴 부분으로 한정하고, 그 인물의 표정을 통해 표현하였다. 이 그림들은 ‘소용돌이’라는 제목의 연작이다. 이러한 ‘불특정 인물화’ 작업과 함께 자주 나의 남동생이 그림의 모델로서 등장한다. 막연하게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었던 ‘나의 감정’이 투영되어 그것을 빠른 붓질로 그렸다고 생각하는 인물화들과, ‘남동생’이라는 특정 존재와 그의 외형이 부각된 그림은 현재 내가 ‘남성’, 그리고 내 나이 또래 청년들을 표현하는 데에 내용과 방식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다. 최근, 인물의 감정 표현과 그에 따른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하는 것을 넘어 좀 더 서사적인 것도 그림에 담아내고 싶었고, 주로 얼굴로 한정해 그려왔던 회화의 소재들이 확장되어 인물과 그의 주변 풍경 등과 문학적인 요소 등 여러 배경적인 것들이 복합적으로 화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림 속에 반영된 감정은 대체로 내가 경험하고 느껴본, 자전적인 것들이다. 화면 속 상황은 거의 모두 나의 상상으로 이루어졌으며, 어떤 특정 인물이나 사진, 상황을 보고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먼저 드로잉과 에스키스들을 통해 회화를 구상한 뒤 그것을 토대로 캔버스에 옮겨가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일부의 것들은 캔버스를 대하고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시작하여 완성해간다. 현재 내 그림들은 서사를 표현하기 위한 요소와 회화적인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즉, 내러티브 적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구상적으로 표현된 회화들도 있고, 상황이나 서사를 재현하기 보다는 (가장 늦은 밤에) 가장 고조된 인물의 감정 자체를 강조하기 위해 회화의 기본적인 표현 요소들인 물감과 붓질 등을 더욱 강하고 거칠게 다루어 추상과 구상의 요소가 모두 존재하는 그림도 있다 (심야(深夜), 2018). 계속해서 주로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다양한 회화적 표현들을 적절하게 구사하고 발전시켜가며 주제를 다각적으로 조명할 계획이다.
덧붙여, 서양 미술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 속에서 남성을 주된 소재와 주제로 삼은 그림들은, 누드 등의 방식으로 여성을 표현한 것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에 있어 ‘남성적인’, ‘여성적인’ 것들을 나누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스위스의 정신분석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여성의 무의식 측면의 ‘남성적인 면’을 아니무스‘Animus’라는 용어로 설명하였다. 내가 지닌 여러 가지 성격들 중 나의 아니무스적인 면이 그림을 창작할 때 가장 크게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의 20대 젊은 여성으로서, 내 그림 속 인물들을 표현함에 있어 직접 보고 듣고 겪어온 또래 남성과 문학, 영화 등의 예술, 또 미디어에서 다양하게 표현된 남성 이미지들에 영향을 받아왔다. 그들을 작업의 주된 소재이자 나의 페르소나로서 표현하며 더욱 다채로운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2018